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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의여유

행복한 삶, 감미로운 죽음

by 그린에서아침을 2017. 1. 12.

아주 오래 전에 이코노미스트 잡지에서 읽고 잠시나마 명상에 잠겼던 글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다. 이상하게 서양에서 동양적인 불교 사상이 묻어 있는 것처럼 작자는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할 죽음을 어떻게 것인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동식물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아 왔지만 알듯, 하다.

 

  

   장례는 인생의 마지막 의식이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의식은 매우 엄숙하게 치러진다. 장례 장면을 그린 대부분의 서양 회화 역시 숙연하고 엄숙한 인상을 준다. 기독교 전통을 중시해 서양에서는 죽음을 존재의 종말로 보지 않았다. 육신의 노고가 끝나고 휴식이 찾아오면 영혼은 천국에 계시는 하느님 곁으로 인도된다고 믿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공포가 없으며 종국적인 심판이 수도 없었다.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이들의 태도는 묘지가 마을 한가운데, 혹은 교회 건물 안이나 밖에 형성된 모습에서 뚜렷이 확인할 있다. 동양인에 비해 죽음을 보다 친근하게 느끼는 듯한 인상이 서양 회화 속에서 쉽게 확인되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마을 사람들 등신대로 그린오르낭의 매장

 



 장례를 주제로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서양 회화는 아마도 쿠르베의오르낭의 매장 것이다. 작품은 19세기의 프랑스 시골에서 벌어진 평범한 장례 장면을 영원히 잊을 없는 미술사적 이미지로 고정한 그림이다.

 

다소 투박한 언덕과 들판을 배경으로 무리의 사람들이 무덤 구덩이 주위에 모여 있다. 화가의 고향인 오르낭 마을 사람들이다. 무려 50여명의 사람들이 등신대로 그려져 있는데(그림의 크기가 315×668㎝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림을 직접 보면 등신대 인물들의 에워싼 듯한 모양 덕에 그림을 보는 사람 또한 장례 현장에 함께 참가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등장인물은 모두 실재했던 사람들로, 쿠르베의 친구들·이웃들·마을 유지들·성직자들 등이다. 재미있는 것은 화가가 그림 왼편에 당시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할아버지를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

돌아가신 혼령조차 참석할 정도로 이런 시골 마을에서 장례는 공동체 전체에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시사한다. 당시의 인정을 엿볼 있게 하는 표현이자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표현이 아닐 없다.

 마을의 시장은 무덤 구덩이 무릎 꿇은 사람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번째, 수염을 기른 다소 뚱뚱한 사람이다. 매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망자가 그의 친척이다. 그의 오른편에 있는, 초췌한 인상을 주는 노인은 검은 옷을 입은 다른 이들과 조금 차이가 나는 의상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공화파인 노인은 혁명기의 의상으로 예전의 사회적 격변을 상기시킨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도 과거에는 그처럼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지금 세상을 하직한 망자도 기억의 편린을 갖고 무덤에 누웠으리라.

 그들 오른편으로 손수건을 갖다대고 흐느끼는 여인들은 쿠르베의 어머니와 누이들이다. 그들을 통해 같은 동네 사람으로서 쿠르베가 느꼈을 개인적인 슬픔을 유추해 있다.

  그림은 평범한 촌부의 장례에 대한 그림이지만, 쿠르베는 그림으로부터 장례식이 주는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고 있다. 빈부귀천을 망라하고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며, 어떤 인연도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므로, 장례식에 참석한 이라면 누구나남은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실존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없다. 비장함이 자아내는 장중한 색채가 볼수록 진하게 묻어난다. 영웅호걸의 장례를 그린 그림보다 장례의 진실을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삶에 최선 다한 사람의 행복한 죽음



 

 죽음 역시 삶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열심히 일한 사람의 잠자리가 열심히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감미롭지 않을까. 크레타 출신의 16세기 화가 그레코가 그린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88)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을 맞는가에 초점을 맞춰 제작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갑옷을 입은 하관되는 인물이 바로 오르가스 백작이다. 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고, 성인들을 흠모했으며, 헤아릴 없이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이렇듯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부와 명예·건강을 올바르고 신실한 일에 그였기에 그가 죽음을 맞았을 하늘은 그의 죽음을 아름답게 기려주지 않을 없었다.

그래서 신은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다. 스테파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성자를 지상에 내려보내 그들이 망자의 주검을 직접 관에 안치하도록 것이다. 황금빛 예복을 입고 주검의 왼편과 오른편을 각각 맡아 관에 누이려는 이들이 바로 스테파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다.

예식에 참석한 성직자들과 문상객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기적에 감사하고 있다. 그들 위로 구름의 아랫부분과 천사가 보이는데, 주제를 그린 다른 대작에서는 죽은 오르가스 백작이 천상에 올라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모습까지 담겨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 죽음으로 존재가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나아가게 된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가득 담겨 있는 작품인 것이다.

독일 화가 카를로스 슈바베가 그린 장례 그림은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사람만이 등장하는 데다 망자의 모습도, 망자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정보도 그림에 드러나 있지 않다. 어쩌면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장례가 있을까.

 

 

  

자기 묘를 파는 노인



 

그림은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눈이 쌓여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는데, 노인이 땅을 파고 있다. 새로 들어온 주검을 누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일을 해온 노인은 오늘도 그저 무심히 삽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자리도 특별한 자리다. 왜냐하면 무덤은 그가 묻힐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을 고지하려 지금 짙은 녹색의 옷을 입은 사자가 무덤가에 내려앉았다. 우아한 자세로 지금 그녀는 말한다. 노인이여, 수고했소. 이제 곳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시구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작은 불빛은 바로 노인의 영혼이다. 노인의 영혼이 그녀의 손에 들린 이상 그도 상황을 어찌할 없을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며 뒤로 쓰러지려는 노인은 손에서 삽을 놓고 있다. ‘무덤 파는 이의 죽음’(189590) 그림의 제목이다.

 

 

 

죽음은 이처럼 아무런 예고가 없다.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한다. 장례 자리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예고 없는, 기약 없는 이별이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했을 것이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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